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김나연
너를 내 세상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그저 낱개의 점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봐달라고. 나에게 글은 너를 향해 나부끼는 찢어진 깃발 같은 것.
주변에 읽는 사람이 많았던, 그래서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 초반부는 우울한 내용도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인지 '세상 너 혼자 우울하냐? 웅앵'이나 무조건적인 '힘내라'는 말보다 자기가 우울했던 얘기를 덤덤하게 풀어놓는 데서 괜히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뒤로 갈수록 공감되는 내용도 많고, 재미있는 내용도 많아서 덮을 때쯤에는 홀가분하게 책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아직 글자의 형태를 띠지 못했던 내 생각들이 명확해졌다. 타인의 세계를 엿봄으로써 나의 세계가 확장된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감정을 누군가가 글로 옮긴 걸 보며 놀라기도 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주변에 이런 멋진 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누군가에게 내가 이런 멋진 언니가 되어주고 싶다고도 생각했던 시간.
어른들은 아이란 체구만 작을 뿐 자신들처럼 오감과 이해력이 발달한 인간이라는 점을 늘 과소평가한다. 그래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거짓말은 늘 성의 없고 어설프다.
가족과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부부만 이혼할 수 있게 해놓은 현재 시스템은 부부와 자식, 형제, 자매, 친인척들 사이에 벌어지는 수많은 문제들을 묵과하고 있다.
지금은 내가 뭘 어쩌든 남을 사람은 남는다는걸 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무엇보다 자신의 무능력함에 가장 크게 절망한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다른 사랑에 아파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이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네 소소한 습관들이 궁금해.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문장마다 밑줄을 긋는지, 책장을 덮기 전에는 모서리를 접는지 띠지를 끼워두는지, 음악을 들을 땐 눈을 감는지, 스피커와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다른지, 샤워할 때는 어디서부터 거품을 묻히는지, 치약은 얼마나 짜는지.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는 벽을 마주하고 모로 눕는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언제를 가장 많이 회상하는지, 그 틈에 내가 끼어들기도 하는지.
"너는 날 재밌는 책처럼 읽잖아요. 내가 궁금한 게 아니라 내 얘기만 궁금해하잖아요. 그래서 다 읽었다 생각되면 덮어버릴 텐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만나요."
모두의 생엔 문득 뒤돌아보면 아직도 반짝거리는 시간과 그 시간을 빛나게 해준, 더 반짝이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깨진 유리구슬이라 해도.
오늘은 어땠어, 하면서 손을 조몰락거리다 잠들고 눈뜨는 그런 삶.
그저 입에 한번 넣어보면 족할 일이었는데, 맛있는 게 맛있다는 걸 알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저마다 익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키우는 데에도 시간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팥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금 격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나를 강간하는 느낌이었다. 상대에겐 잘못이 없다. 내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 건, 내게 폭력을 가한 건 나 자신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양 있는 현대 여성'이어야 한다는 나의 슈퍼에고가 내 입을 틀어 막았다. 내면 깊숙한 곳의 현명한 나연니는 '당장 여길 벗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현실 속 나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싫어요.' 한마디면 될 일인데 '죄송'의 지읒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선 자신에 대한 보호 본능이나 자유의사보다 사회화와 교육의 목소리가 더 컸다. '상대의 체면과 사정을 먼저 헤아려야 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지.' 결국 상대의 기분이 상할까 봐, 나 때문에 여기까지 나오게 한 게 미안해서, 내가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고 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어서, 혹 어떤 경위로 나를 협박할지 알 수 없어서, 성적 끌림 이외의 '복잡한 심경'때문에 섹스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들여다 보았음에도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헤어졌다.
사람을 만날수록, 연애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늘어나는 건 연애 기술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나는 이런 인간이구나, 나는 여기까지밖에 못하는구나, 난 이건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구나, 난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구나. 그런 까닭으로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사랑할 수 없다.
여행에선 길을 잃는 것이 좋다. 사실 아는 길도 없는 주제에 길을 잃는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밟아본 만큼 내 땅이 된다는 것이다. 낯선 방향으로 발길을 돌릴 때마다 내 지도는 매분 매초 새롭게 쓰인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만의 지도를 만든다.
사람뿐 아니라 감정에도 이상형이 생겨서, 자신이 정해놓은 사람에게 원하는 형태로 애정을 확인받지 못하면 외로움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나는 너무 행복하면 그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버거울 땐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정말 눈물나도록 행복한 순간엔 그대로 숨을 거두고 싶었다. 더 행복한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여기서 이대로 그만. 낙담도 아니고, 지금보다 더 행복하기 힘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도 아니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감도 아니다. 삶을 종료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종료 버튼을 누르고 싶다는 기분인데, 너무 재미있는 게임이었고 가장 만족스러운 엔딩을 봤으니 인제 그만, 이 정도면 충분했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의 만족감.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사람일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쉽게 희석되어버리는 내 존재감인 걸까?
행복의 기준을 타인으로 삼아선 안 된다. 내 행복에 대한 결정권을 타인에게 넘기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타인만 남는다. 그 타인마저 증발하면 '나'라는 모래성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지금 궁핍하지 않더라도 언제 다시 돈이 급해질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 해. 소비의 순간마다 그 불안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 하지만 또 먹고 살려면 소비는 해야하잖아? 그래서 이젠 모든 종류의 쇼핑이 피곤해.
나는 인생이란 각자의 백과사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어 간의 미묘한 차이를 체감하고 자신만의 정의를 정교화해 그에 가장 적합한 용례를 수집해두는 일. 그렇게 생각하면 왜 우리는 같은 일을 겪고도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갖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설명이 친절해 필연적으로 두툼하고 다정한 백과사전을 가진 사람이 좋다. 내 단어를 다 껴안고도 남을 만큼 많은 단어를 가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