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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남자들과의 관계는 늘 삐걱거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욕심을 부릴수록 '남자에게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과 '남자에게 이기고 싶은 욕망'이 제각각 증식하며 충돌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분열했다. 만남을 잘 이어가다가도 반복적으로 폭발하곤 했다. 내가 아닌 모습, 강남 도련님들이 좋아할 만한 참하면서 동시에 섹시한 여자를 연기해야 한다는 자괴감, 남자는 실력으로 경쟁해야 하고 이겨야 할 상대인데 그런 대상에게 초이스받아야 한다는 굴욕감, 결국 결정권이 나에게 없다는 데서 오는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한 수치심까지. 사실상 남자와의 관계보다 스스로의 내적 갈등과 폭주에 쏟은 에너지가 훨씬 컸다.
여자들은 권력에 대한 감각이 없고 권력욕도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나의 욕심은 분명 권력욕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력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런 유의 욕망을 드러내고 스스로 권력을 쟁취한 여자를 보지 못한 탓에 확신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남자들에게 선택받아 그 남자의 자산을 공유하는 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훨씬 쉽고 가능성 있게 느껴졌다. 논현동에서 목격한 것은 이런 생각에 무게를 더했다. 20대 때 남자에게 욕망당하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건 이 때문이다. 한창 커리어에 집중하고 성장해야 할 시간이 심리적 내전 상태에서 흘러갔다. 우울과 분노와 자책의 총구가 향한 곳은 물론 나였다. 남자들도 이렇게 권력욕을 분산시킬까? 직업인으로서의 성공과 남자로서의 성공, 두 마리의 토끼를 쫓을까?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김진아
나는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공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6년간 경험하지 못했던 '여성 혐오'에 온 몸을 부딪혔으며, 피투성이가 된 채 대학을 졸업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한 번도 내가 제출한 과제를 내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대학교 진학 이후, 특히 구남친을 사귀게 된 이후로, 나는 내 과제를 내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을 전제로 한 교수님들 앞에서 '내가 했음'을 증명해야만 했다. 한 학년 위의 과탑이었던 전남자친구의 존재는 내가 과제를 내 힘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에 충분한 전제였다. 나는 내가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과제를 하는 시간 이외에도 발표와 보고서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었어야만 했다.
1을 해도 0.7~8정도밖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꼈다. 1.2는 해내야 1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환경은 나를 극단적인 완벽주의로 만들었다. 이런 성격은 조 과제에서 빛을 발했다. 특히 그 누구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조 과제에서 그랬다. 회의에서는 A를 목표로 이야기했지만, 대개는 B나 C 정도의 퀄리티의 결과물이 나오곤 했다. 저번 주 모임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냐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변은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아냐? 애초에 B, C로 얘기했던 건데."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없는 자리, 회의 중간의 담배 타임, 화장실, 그리고 늦은 밤 술자리에서 2차, 3차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을.
한 학기 동안 '그들만의 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던 내가 선택한 방법은 조장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초대받지 못한 회의는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 매주 회의를 녹음하고, 회의록을 작성했다. 그들만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묵살했다.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으셨잖아요. 지난 주 회의록 보시겠어요?" 그들은 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서는 누구보다도 신랄하게 나를 깠으리라.
그렇게 2학년을 마치고 나니 삶에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거지? 7과목 중 5과목이 조 과제였던 그때, 나는 걸핏하면 울었다. 인적이 드문 화장실에서, 또는 친한 친구들을 붙잡고 울었다. "자퇴하고 싶어.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나는 '내가 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싶지 않았고, 원치 않는 담배 타임과 술자리를 쫓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자퇴를 하겠다는 나를 뜯어말렸다. 그렇지만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했다. 그렇게 나는 휴학계를 제출했다.
1년 뒤 나는 복학했다. 복학생이 된 내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건 '복학생 뭐 별거없네.'하는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는 거였다. 2학년을 시작할 때 '군 복학한 복학생들이 엄청 열심히 해서 이제는 학점 받기 힘들어질 거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복학생이 되니 그 얘기는 순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과연 대학 재학 중에도 놀고먹던 사람들이 군대에 있을 때 자유 시간을 아끼고 아껴서 전공 공부를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하는 식의 이야기는 고깝게 들렸다. 네네, 님 선배 맞으신데 어차피 이 내용은 님도 나도 처음 듣는 수업 아닌가요? 그럼 피차일반이겠구먼. "내가 재수강이라서 하는데"하는 이야기는 코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잘 아시면 한번 들을 때 A+받아가시지 왜 돈 낭비, 시간 낭비하면서 재수강하고 계세요? 그렇게 나는 시니컬한 쌍년이 되었다.
4학년. 모두가 진로 고민을 하는 시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고민이 많았다. 전공을 살리자니 평생을 '시니컬한 쌍년'으로 살 자신이 없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내 좌우명은 '낭중지추'였다. 나 자신을 애써 PR하지 않아도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나를 드러내보이는, 그렇게 내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나는 '내가 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내가 했음을 인정받지 못했고, 내가 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남 앞에 서는 일이 많아졌다. 어떻게 해야 내가 했음을 잘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마케팅 분야도 얕게 공부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쩌면 마케팅이 나와 잘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마케팅 분야의 취업에 도전했다. 마케팅 분야가 문과에서도 날고 기는 사람들이 많이들 선호한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실력이 빤한 남자 선배들이 나는 서류부터 탈락한 기업에 척척 붙는 모습을 보면서(물론 지원한 분야가 다르긴 했지만) 속이 타는 기분이었다. 4학년 2학기의 끝이 다가올수록 더 그랬다. 하나둘씩 취업하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지켜보던 나는 12월 중순 경, 학교와 연계된 기업의 마케팅 본부 인턴으로 취업했다.
아무도 안물어보고 아무도 안 궁금해했을 이 이야기를 길게 쓴 이유는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지난날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취약한 인맥 관리보다 그나마 잘하는 일에 올인, 일로서 나를 증명'하는 모습에서, '내 존엄을 구하자는 조급함'이 앞서 사표를 쓰는 모습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봤고, 그래서 아팠다. 나는 시니컬한 쌍년이 되어버린 나보다, 내가 한 일과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싫었다. 우울과 분노와 자책의 총구는 상황과 사회가 아니라 나를 향했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 자신과 싸웠다. 나는 나의 가장 큰 적이었다.
내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1년의 인턴 기간 동안 타지 생활의 설움을 맛본 나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야망을 접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다. (첫 급여가 110만 원이었는데, 침대와 책상, 샤워시설이 있는 고시원 월세로 45만 원이 나갔다. 부모님의 지원으로 훨씬 쾌적한 원룸에 살면서 나보다 적은 방세를 부담하는 동기들이, 서울에서 나고 자라 애초에 방세를 낼 필요가 없는 직원들이 정말 부러웠었다.)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중소기업은 대체로 마케팅 팀이 없었고, 해외 영업은 남자만 뽑는 경우가 허다했다. 영업과 관련해 여성에게도 기회를 주는 건 '영업 사무 보조' 정도. 그렇지만 '보조'따위를 하고 싶지는 않아서 시작한 공무원 시험이었다. 특별히 누구 눈에 든다거나 정치를 할 필요 없이 맡은 일만 잘하면, 연차가 쌓이면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이런 선택을 한 나 자신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성실하게 일하고 성과를 낸다면 어디서도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런 이유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되다니. 그리고 나는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나 자신과 싸웠다. 나의 권력욕, 야망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되는 게 맞을까, 아니라면 나는 어떤 일에서 두각을 보일 수 있을까, 나는 또다시 그들만의 리그에 참여해야만 할까, 아니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시험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10일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동안 나는 최대한 많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 여성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내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내 삶을 이끌어나가고 싶다. 회사의, 사회의, 가부장제의 부품으로만 살기엔 내 야망은 크고 아름답다. 나의 야망을 위해 온전히 나를 던질 수 있는 삶을 꿈꾸며.
'백마 탄 왕자'처럼 실재하지 않는 가짜 권력에 속지 말자. '예쁘다'는 찬사는 '추한 여성'이라는 낙인보다 더욱 강력하고 교묘한 현실 통제 수단이다. 그 안에 매몰돼 더 이상의 꿈을 꾸지 못하도록 막는다. 모든 여자는 아름답다? 아니, 여자는 예쁠 필요도 욕망당할 필요도 없다. 수많은 여고생들이 간절하게 '픽미업'을 외치는 그림이 괴이하지 않은가? 우리는 초이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해방되는 순간 진짜 힘이 생긴다. 타인이 아닌 나에게 힘을 돌려주자.
뼈에 새겨지다시피 한 성적 대상화, 남성 숭배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성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좋아서 하는 다이어트? 좋아서 하는 덕질? 나의 선택,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첫 단계다. 이 과정 없이 가부장제에서의 독립은 성공할 수 없다. 설사 경제력이 있다 해도 말이다.
외모 권력이라는 말은 그래서 모순된다. 권력은 초이스를 하는 쪽에 있지 초이스를 받는 쪽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외모 권력은 허상이며 타인에게 성적으로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 역시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내 안에 내면화한 남성의 시선, 남성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한 채 살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다른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탈코르셋'은 그저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깨닫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성적 대상화에 몰두했던 사람일수록 이 의미를 잘 이해한다.
여성이 국가, 종교, 제도, 관습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독립된 자아로서 존엄 있게 존재하는 것이 여성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쉽고 빠르고 편한 방편을 찾아 소위 '꿀'빨고 싶은 생각.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지고 싶은 생각이야말로 내 안의 야성과 존엄, 둘 다를 죽이는 '독'이다. 여성이 제발로 제도, 관습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독사와 같은 유혹. Dignity는 아직도 이 실체 없는 유혹과 싸우고 있는 나 자신이 매일 곱씹는 말이자 나를 포함하여 평생에 걸쳐 세뇌된 '반쪽 느낌'과 싸우고 있는 여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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