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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니다/이별 그 후.

18.12.30.

도하르방 2018. 12. 30. 10:58

 헤어지기 직전에 자주 했던 생각 중 하나는, 내가 너무 어릴 때 첫 연애를 시작했다는 거다. 혹자는 요즘은 초등학생부터도 연애한다는데, 대학교 입학 이후에 시작한 연애가 뭐가 빠르다는 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어리다'는 소위 말하는 '나이가 어리다'와는 다른 개념이다.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만 믿고, 대학에 입학한 내가, 대학 이후의 삶, 새로운 가치관이나 목표를 확립하지 못한 '어린' 내가 만난 그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자기 가치관이 뚜렷하고, 하고 싶은 일이 명확했다. 누구나 꿈꾸는 '대기업에 입사해서, 많은 월급을 받으며, 인생의 탄탄대로를 걷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일을 하며 프리랜서로 살고 싶다던 그가 멋져 보였다. 남들이 제시한 길을 따라가기에도 벅찼던 나와는 달리, 내가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했던 그는 도전적이었고, 야망에 가득 차 있었다. 명확한 가치관이랄게 없던 내가 이 사람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했다. '사랑하는 것은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떤 가치관도 없었던 사람이 가치관을 정립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타인의 가치관을 자신의 가치관인 양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노력 없이 그의 가치관을 받아들였고, 그는 내 삶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의 내가 너무 어렸다는 것도.




 7년 동안 '헤어지자'는 얘기가 한 번도 안 나왔던 것은 아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다섯 번 정도 얘기가 나왔었다. 네 번은 그가, 한번은 내가 말했다. 두 번은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러니까 1년 사이에, 나왔었고, 세 번은 헤어지기 직전에 나왔었다. 마지막 '헤어지자'를 빼고는 그저 해프닝이었다. 아니, 해프닝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거라곤 내가 뭔가 그에게 거슬리는 일을 했었다는 거다. 그는 나의 행동에 기분이 상했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의 가치관과 기준이 곧 나의 기준이었기에, '헤어짐'은 나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의 나는 비굴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그의 집 앞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카톡만 남긴 채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결국은 그가 나왔다. 우리는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카페에서 오랜 얘기를 나눴다. 아니, 나는 오랫동안 사죄했다. 이러이러한 행동으로 기분을 상하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게. 나에게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내가 두 번째로 그의 집 앞에 찾아갔을 때, 그는 말했다. "마지막이야." "……." "세 번째로 내 입에서 헤어지자는 얘기가 나오면, 그때는 진짜 헤어지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는 헤어지자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나의 모든 행동, 생각, 취향까지도 검열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갑작스럽게 그를 잃는 것보다, 나를 잃기가 더 쉬웠다. 그렇게 나는, 하나둘씩 나를 잃어갔다.


 그 이후로 우리는 싸우는 일이 없었다. 나는 항상 그가 해달라는 대로 해왔으니까. 그가 하는 '부탁'들을 무조건 들어줬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귀면서도 싸우는 일이 없냐는 질문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자주 싸우는 친구들을 보며 왜 그렇게 자주 싸우냐며 타박했던 적도 있다. 사실 연애의 과정에서, 아무리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할지언정 그 이전의 시간들, 20년 이상을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모든 일에서 의견이 일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서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싸우고, 합의점을 찾으면서 함께 전진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싸우는 것보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편했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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