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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니다

또 다시 숏컷

도하르방 2019. 8. 4. 16:46

  다시 머리카락을 잘랐다. 미용실 사장님은 이 정도면 많이 기르긴 했네. 그렇지만 역시 자기는 숏컷이 더 잘 어울려.”라며 이제는 단발머리라고 우겨도 될법했을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주셨다. 기른 지 반년은 되었나. 한때는 숏컷이었던 머리카락은 더벅머리가 되었고, 맥가이버 머리를 지나서, 이제는 단발이라고 우겨볼 만한 기장이 되었다. ‘되었었다.’가 맞는 표현일까. 지금은 다시 숏컷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기르는 데는 반년이 걸렸지만, 자르는 데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가벼워진 머리로 미용실 문을 나섰다.

  머리카락을 다시 기르기 시작한 이유는 많았다. 자주 가던 미용실이 확장 이전하면서 여성 커트 비용만 천 원이 올랐고, 집에서부터의 거리도 멀어졌다. 시험 준비를 하면서 시간은 늘 부족하게만 여겨졌고, 미용실에 가는 시간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졌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고정 수입이 없어진 마당에 고정 지출은 부담스러웠다. 이참에 잠깐 기를까? 생각을 바꾸니 핑곗거리는 늘어만 갔다. 그러고 보니 유치원 졸업한 이후로 긴 머리였던 적이 없네. 긴 머리가 더 관리하기 편하대, 질끈 묶으면 되니까. 그렇게 머리카락을 길러야 할 이유는 하나둘씩 늘어갔고 결국 나는 머리카락을 기르게 되었다.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 이외에 나는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거울로 눈이 갔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얼굴의 트러블들이 눈에 들어왔다. 트러블을 시작으로 흉터로, 넓어진 모공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 결점이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타인의 결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다시 나를, 그리고 타인(특히 여성)을 평가하고 있었다. 고작 머리카락이 좀 길어졌을 뿐인데.

 머리카락을 처음 잘랐던 날을 기억한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미소년 같다였다. 나름의 칭찬이었을 거라 생각하고 감사하다며 웃어넘겼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고작 머리카락만 잘랐을 뿐인데, 나는 여전히 화장을 하고, 그 전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 소년처럼 보이는 현실이, 이렇게 쉽게 여성성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공중화장실과 같은 장소에서 나를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여성분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죄의식을 가졌다. 난생처음 보는 누군가가 다짜고짜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물을 때, 그리고 뒤돌아서서 여자가로 시작하는 웅얼거림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의 편견에 넌더리를 냈다.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 키라는 162.56cm도 채 되지 않는 내가 고작 머리카락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으로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했고, 짧은 머리카락 외에는 어떤 눈에 띄는 특질도 없는 일부 한국 남성이 안쓰럽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다시 기르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 또한 거울 속 숏컷의 나를 남성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를 향했던 여성 혐오 기제가 힘을 잃었음을.

 머리카락의 길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여성 혐오를 타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내 안의 여성 혐오를 타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당분간 숏컷을 유지하기로 했다. 나를 평가하는 잣대가 사라져야 타인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평가라는 것은 비교를 기반으로 하는 거니까. 고정 지출은 부담스럽지만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싸움은 훨씬 더 부담스럽다. 언제쯤 나는 거울 속 나를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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